영화 항거 유관순 실제 인간적인 모습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유중권과 이소제의 사이에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나요..
아버지는 지역의 흥호학교 운영에 참여해 인재 양성에 힘쓰고 자녀교육에도 적극적이었어요..
큰아들은 공주 영명학교 둘째딸 유관순이 서울로 유학을 해 이화학당에 공부합니다.
기독교 감리교 충청도 교구 본부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 샤프의 추천으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해요..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4월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합니다.
유관순 열사는 뜨개질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장난기도 많은 평범한 소녀 였다고 하죠..
독립운동가 이자 소꿉친구 남동순열사 의하면 샘이 많고 찰지고 영특했다고 합니다.
5촌 당질 유제경에게 뜨개질한 모자를 선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기도 시간에도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를 명태 이름으로 빕니다라고 해서 품행점수 낙제점을 받기도 했다고 하죠..
유관순 열사 생김새에 대해 아래 위가 고르고 튼튼한 체격으로 유관순 키가 169센티 였다고 합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 상복을 입고 휴고하고 2월 28일 정기모임으로 전교생이 만세를 부르기로 해요..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을때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이라는 정보를 안 학교는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이 교정을 지키죠..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은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와 결사대를 조직해 프라이 교장은 교문을 막고 시위 참가를 만류했지만 담을 넘어 탑골공원에 나가 만세를 부르고 옵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고조되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를 내리고 유관순은 13일 귀향했어요.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마을 어른에게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옿고 만세운동을 계획하죠..
유관순과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고 3월 31일 자정 병천시장을 중심으로 천안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객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홧불을 올려요..
유관순 체포
4월 1일 유관순, 조인원, 유중권, 유중무와 병천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만세 삼창을 하죠..
해산에 불응하자 발포를 해 사람이 사망하자 헌병주재소에 옮겨 항의해요..
만세를 부르며 사망자 조치와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자 유중권은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이러 동생 유중무는 형을 업고 주재소에서 치료를 요구했어요..
군중이 늘자 헌병은 통을 쏘고 시위대는 조선인 헌병보조원에게 동족을 어찌 죽일 수 있냐며 항의하고 유관순은 주재소장에게 항의하죠..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총에 맞아 사망하자 소식을 듣고 온 모친이 아들의 시신을 안고 울자 일경은 창과 칼로 찔러 살해합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하고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주며 연설했어요.. 일본 헌병은 총을 쐈고 유관순 열사 부모도 일본군에 학살되었고 유관순도 체포됩니다.
공주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 나는 조선 사람이고 너희들은 우리땅에 와서 우리 동포를 죽이고 나의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들은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했고 일본 검사는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는 말에 유관순 열사는 의자를 집어 던졌다고 하죠..
유관순은 1심에거 5년형을 받았지만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받아요.. 함께 재판을 받은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유관순은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상고하지 않아요..
유관순은 3.1운동 1주년으로 옥중 만세운동을 하고 이 일로 모질고 잔혹한 고문을 많이 당했어요..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과 함께 옥중 만세운동을 하고 3천여명의 수감자들이 호응해 만세소리가 밖으로 퍼져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했다고 해요..
유관순 사망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요,
유관순 열사는 결국 모진 고문으로 인해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사망합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갑상선 기능저하증으로 사망했다고 해요..
죽기전 유언으로 ”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일본은 패망할것이다.” 라고 했다고 하죠..
일본은 유관순 열사 몸에 있는 잔인한 고문의 흔적들이 드러나길 원하지 않아 석방되기 전에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이화학당은 시신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제가 거부했고 이화학당 교장 월터는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하자 일제는 해외언론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장예를 치른다는 조건으로 시신을 인도할 수 있었어요..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 시신이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되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장례를 치르지만 일제는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됐지만 시신이 없고 유관순 생가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가 봉인돼 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