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누구?
전봉준 별명은 녹두장군이었어요.
전봉준 1855년에 태어나 1895년에 교수형으로 사망합니다.
전봉준은 서당, 한약방을 운영하였고 조선 후기 몰락양반 집안으로 보입니다.
전봉준 아버지는 고창 당촌 마을 서당 훈장 고부마을에서 향교의 장의를 했다고 합니다.
전봉준은 한학을 배웠어요. 유난히 키가 작아 152센티에 불과해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생긴겁니다.
가난해 논밭이 세마지기였고 가세가 기울어 순창 임실을 떠돌다 서른에 고부 마을에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했어요.
충수지리를 보고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고 편지를 대필해 주었습니다.
30에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고 운현궁에서 2년 남짓 흥선대원군 식객으로 있었어요.
탐관오리 고부 군수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해 부조금 2000냥을 가져오라고 해서 항의하러간 아버지가 곤장을 맞고 사망합니다.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는 비를 세우고 비용을 백성들에게 지우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백성들의 노동력으로 동원해 건설하고 사용료도 백성에게 징수했어요.
전봉준은 1894년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관아를 습격해 백성에게 곡식을 나눠줍니다.
정부에서는 조병갑을 처벌하고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지만 그도 만만치 않은 횡포를 부립니다.
전봉준은 다시 군대를 모으려하지만 순창군 피로리에서 만난 옛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됩니다.
도성에 압송되어 재판 후 동학농민운동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김덕명, 전봉준은 사형당합니다.
시신은 유족에게 넘어가지 않았고 수습이 안되었으며 현재의 단국대학교 죽전 캠퍼스 야산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김개남의 시신은 찢겨져 한동안 효수 되었고 찢긴 시신은 임실군 학암리 야산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손화중과 최경선 시신을 알 수 없다고 해요.
전봉준 가족은 2남2녀로 장남 전용규는 사망하고 차남 전용현은 이름과 족보를 바꾸고 은폐해 대를 이어왔고 장녀 전옥례는 아들 둘 차녀 전성녀는 딸을 하나 두었고 전옥례는 전봉준의 딸이라고 나타난 후 1970년 사망했습니다.